속도와 종교





속도와 종교의 문제는 참 흥미롭다. 나는 신학도로서 물리학에 대하여서는 문외한이지만 상식적으로 속도란 시간당 공간이동 거리를 수치화 한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속도가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다루는 것이기에 이것을 종교에 대응시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종교에서는 인간 이외의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종교관에서 신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하는 존재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속도란 용어는 신앙의 대상인 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용어다. 그래서 나는 종교와 속도의 문제를 인간사회속의 문제로 제한하여, 역사라는 시간축과 그 종교가 수용되는 지역이라는 공간축을 설정하고, 시간속에서 교세가 확장되어 가는 속도를 가져다 주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려고 한다. 아울러 종교의 수는 많으나 감히 다른 종교에 대하여 평하기가 외람된 것 같아서 필자가 가진 기독교를 중심으로 논할 것임을 밝혀 둔다.

기독교에는 ‘전도(Evangelism)’라는 것이 있는데, 속도라는 측면에서의 기독교의 독특성은 바로 이 전도에 있다. 기독교에서의 속도계는 전도활동을 통하여 변화한다. 전도활동은 진리정보(복음)를 비기독교신자에게 전달하여 진리를 수납하도록 도와주어 신앙인이 되도록 하는 활동이다. 전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이 내면적인 변화와 총체적인 삶의 변화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메시지를 복음(Gospel)이라고 한다. 전도라고 하는 복음 전달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부과한 최고이자 최후의 명령이었다. 이 임무달성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열 두 제자들을 선택하여 훈련시켰다. 그래서 전도명령이 내려진지 1세기가 채 끝나기 전에 기독교가 소아시아, 로마와 북부 아프리카, 중동, 인도 지역까지 전파되었다. 로마제국시대 당시 네로 황제를 비롯한 10대 황제들의 대 박해를 거치면서도 기독교는 만 3세기이내에 전 로마제국을 기독교화 시키는 놀라운 속도감을 보여 주었다.^ 이때 기독교 속도계는 최고의 수치를 가리켰다. 그때 뿐만 아니라 지금도 정상적으로 신앙교육을 받은 신자들은 전도를 자신의 일생 과업으로 여긴다.
기독교에서 전도라는 독특한 활동이 중시되는 이유는 진리의 유일성에 대한 절대적 확신이다. 신자들은 이 진리의 유일성에 대하여 강한 확신을 가지고 신앙을 지키고 전파하기 위하여 생명까지 바친다. 진리의 유일성에 대한 확신있는 설득은 듣는 사람들의 신앙적인 선택을 촉구한다. 이로 인해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심령을 파고 든다. 특별히 18세기부터 근대적인 기독교의 선교운동이 시작되었는데 많은 서구 기독교선교사들이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에 의지하여 각 대륙과 오지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헌신적으로 기독교와 함께 교육, 의료, 서구문명 등을 전달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풍토병과 원주민들의 박해속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다.

기독교에 있어서 속도가 거의 0인 시대도 있었다. AD 6세기에서 15세기까지 소위 ‘중세 암흑기’라고 하는 약 천년의 기간이었다. 이 기간은 유럽전역이 기독교화 되면서 교권이 세속권력까지 쥐고 있던 때다. 이 기간은 엄밀하게 따져서 기독교진리가 유럽을 지배하였다기 보다는 기독교 옷을 입은 미신들이 대부분의 유럽대중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사제단이 진리의 원천인 성경을 사어인 라틴어로 묶어 둠으로 민중들이 직접 진리를 접할 권리들을 제한한 데 있다. 이로 인해 민중들은 사제들의 잘못된 가르침속에서 온갖 미신과 부패의 희생물이 되었다. 진리를 외면한 종교지도자들의 부패는 빠른 속도로 종교의 발전 가속성을 박탈하였고 진리를 모른 채 맹목적인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종교 발전속도에 짐이 될 뿐이었다.

정체된 기독교에 속도감을 다시 회복시켜 준 것은 1517년 마틴 루터의 교회개혁이다. 필자의 견해로 그 당시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성경을 대중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로 인해 민중은 직접 진리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기독교회는 본래의 진리로 회귀하게 되었다. 종교가 본래의 진리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본래의 진리의 자리로 돌아올 때 종교의 속도는 가속화 되는 것이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반박문과 번역된 성경 보급에 박차를 가한 것은 쿠텐베르그의 인쇄술이다(1445년). 인쇄술은 부패된 사제단에 대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2주만에 전유럽에 파문을 일으켜 루터의 개혁이 성공하게 된 중요한 외적 요인 중에 하나다. 기독교는 진리 전파(Evangelism)를 위하여 매체나 전략을 사용하는데에 있어서 매우 적극적이다. 종교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유익하다면 방법적인 면에서 변화와 전략을 위한 투자와 다양한 매체활용에도 빨라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현실대처 능력이 빠른 종교이다. 기독교의 이런 장점은 현대에 와서 다른 종교들의 포교활동 방법 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회사에서 있어서 우리나라의 기독교 성장속도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개신교(Protestant)가 들어온 것은 1884년이다. 그 이후 약 1세기가 지난 현재 한국인의 약 1/4은 기독교인이라 한다. 많은 고난과 박해속에서 한국 기독교는 몇 차례 급속도의 부흥기를 거쳤다. 특히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세계교회사에 드문 기독교부흥이 일어났는데,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신자들의 회개운동이었다. 기독교의 특징은 죄를 짓지 않는 무죄성에 있다기 보다는 지은 죄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시인하는 진실성에 있다.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참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1907년 당시 각 기독교집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자주 있었다. 어느 교회 장로가, 자신의 과거에 주인으로 섬기던 사람이 임종시 유산을 남기며 누구에게 전달해 달라 부탁했는데, 그것을 가로채어 자신이 부자가 된 것을 교인들 앞에서 고백하며 회개하던 일이 있었다. 또 어느 교회에 집사부부가 있었는데 부인이 남편 몰래 외도를 했다. 어느날 집회 도중, 간음 죄에 대하여 찔림을 받고 서서 그 죄를 회중 앞에서 참회의 눈물로 고백하고, 남편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써 죄를 고백하는 아내를 안으며 ‘용서하겠노라’ 하던 식의 일이 당시에 비일비재하게 일어 났었다. 죄를 고백함으로 뒤에 올 고난들 마저도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회개하던 이런 시기에 한국기독교의 성장속도는 최고에 달했다.

이에 비해 요즘 와서 한국기독교의 성장속도는 많이 저하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 중에서 구성원들의 진실성의 결여가 중요한 요인이라 생각한다. 한국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의 수효 중 많은 부분을 기독교인들이 점유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한국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많은 비리와 부정속에 기독교인들이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문제는 그들이 국민들이 공노하는 죄를 지었으나 지은 죄에 대하여 부인하거나 죄를 지으면서도 죄로 여기지 않는 부정직성에 있다. 공적인 죄는 공적으로 참회하고 사적인 죄는 사적으로 뉘우쳐야 한다.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신자 개개인이 투명한 모습으로 사회에 자신을 내어놓지 않는다면 종교의 확장속도는 저하될 것이다.

종교에 속도감을 고조시키는 또 다른 요인은 신자들의 헌신성에 있다. 먼저 자신이 믿는 종교진리에 대하여 얼마나 헌신하는가. 그 종교의 가르침을 얼마나 진실하게 따르는가 를 판단해야 한다. 다음으로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얼마나 책임감 있는 삶을 사는가이다. 우선 외적인 측면에서는 한국기독교인들의 종교진리에 대한 헌신성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있겠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한국기독교신자라면 일주일에 적어도 3일 정도는 예배나 기도회 등에 참여 한다. 이런 시간에는 어김없이 설교나 교육의 시간들이 있는데, 이 시간들을 통하여 신자들은 순화되어 간다. 또 한국기독교회에는 새벽기도회 라는 것이 있다. 새벽기도회는 한국기독교 초기부터 있어온 전통이다. 대부분 잠든 새벽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각 교회로 모여든다. 간단한 찬송과 성경의 메시지를 듣고 기도한다. 이들의 주된 기도내용은 자신의 신앙문제(종교적 헌신성)와 나라와 민족을 위한(사회적 헌신성) 것이다. 새벽마다 나라를 염려하며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최소한의 애국애족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신의 종교진리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면 누가 그 종교에 감화되겠는가. 또 사회와 이웃에 대하여 관심조차 두지 않고 이기적인 삶을 산다면 어찌 그 종교에 감화가 있겠는가.

종교는 그 특성상 절대적인 진리와 절대자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 종교자체의 궁극적 실체는 변하지 않는 것어야 한다. 도리어 종교에 의하여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변해야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종교는 이미 속도를 잃은 종교이다. 경제는 이윤에 의해서 속도감이 붙고 죄는 쾌락성에 의해서 속도가 상승된다면 종교의 속도를 향상시키는 것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