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아내
마르크스는 러시아, 중국 등 세계적인 여러국가들이 공산혁명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이론적
근거들을 제시하였다. 결국 그의 이론이 없었더라면 공산혁명이라는 것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현대 세계사상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다. 전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국가들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그의 사상의 영향하에서 살아왔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이론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추종한 것은 지금까지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가히 천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과 사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데는 또 다른 한 사람의 공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 예니 폰 베스트팔렌의 공이었던 것이다. 예니는 1814년 독일의
한 귀족 가문에서 그의 남편 마르크스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녀는 대단한 지성과 특출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게다가 보기에 드물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어서 당대의 유명인사들까지 그녀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의 유명한 시인 하이네,
문학가 펄벅 여사까지 그녀의 식견, 교양, 아름다운 용모에 탄복할 정도였다. 그의 독특한
선견지명은 마르크스 속에 잠재되어 있던 천재성과 혁명성을 미리 간파하고 그를 남편으로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그녀의 문학성 또한 특출하였는데, 사실 예니의 문학성이 없었더라면
마르크스의 이론들은 사장되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악필로, 떠 오르는 사상을 거칠게
써 놓은 원고는 난해하여 자신마저도 판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예니는 그녀의 지혜와 문학적
가치를 동원하여 마르크스의 원고를 일반대중들이 알아보기 쉽게 다시 표현했을 뿐 아니라
설명까지 곁들여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마르크스 자신도 “미리 예니의 의견이나 비판을 받지 않고는 어떤 원고도 인쇄에 돌리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결국 그녀는 마르크스 일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었던 비서이자 조언자,
그리고 혁명의 동지였다. 평생 그와 함께 공산혁명을 위하여 일하던 예니는 1881년 12월
2일, 예순 세살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헤스라는 여자는 그의 죽음을 “자연은
그의 죽음에 의해 걸작을 잃었다. 왜냐하면 자연조차도 전생애를 통해 이렇게 유능하고
인간을 사랑한 여성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필자는 이 여인의 생애를 기록한 책을 읽고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한숨을 어찌할 수
가 없었다. “예니여, 예니여, 네가 조금만 덜 똑똑했더라도 세계가 그토록 어지러웠지는
않았을 것을 ......”
전성진
199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