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같은 교사
우리집 강아지 이름은 복실이 이
다. 왜 복실이냐 하면 털이 복실 복실 나 있어서 복실이며, 비록 밥은 제 때 잘 얻어먹지는
못하지만 간혹 정성을 들여 맛있게 요리를 해서 주는 주인을 잘 만나 복이 많아서 복실이다.
내가 보기에 복실이는 참 착하다. 그래도 고게 밥 값(=꼴값:생긴값 이라기보다 가축들이
먹는 것을 꼴이라고 짐승들이 하는 밥값을 꼴값이라고- 전 전도사 왈) 한다고 하루종일
집을 비우는 바쁜 주인짐들을 대신해서 혼자서도 집을 참 잘 본다. 어쩌다 한 번쯤 집에
있다. 보면 외판원들이나 우체부, 그저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혹은 예기치않은 방문객들
등등, 즉, 복실이의 기억에는 입력되어 있지 않은 낯선 사람들이 집 대문에 얼씬거리게 될 때
어김없이 터지게 되는 복실이의 그 다부라진 고함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개의 크기는
겨우 두 그릇(?) 분량 밖에 될 것 같지 않은데 한 번 짖기 시작하면 왠만한 어른도 만만치
못하다. 때론 그 짖는 소리의 심각성이 마치 목숨이라도 떼어 놓고 짖는 것 같다. 어디서 그런
공포심을 조장하는 힘이 나올까? 이와 반면에 나에게는 그래도 주인이라고 너무도 상냥하다.
한 번씩 복실이의 초라한 집을 불싱 방문할 때면 주인왔다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꼬리를 흔들며 폴짝 폴짝 뛰면서 내 발에 제 입을 마추고, 평소에 그의 혀로 닦아 윤이 나는 그
복슬한 털을 내 다리에 부빈다. 지금은 나를 반겨주는 아내가 있지만 전에 내가 장가 못든
노총각이었을 때, 밤늦게 돌아와 아무도 없는 싸늘하게 불 꺼진 집 대분을 열고 들어설
때 에도 어김없이 문앞에서 반기는 이도 다름아닌 복실이었다. 아침이든 낮이든 밤이든 비오는
날에도 변함없이 나를 반기는 충실한 복실이, 언덕 허리에 걸쳐 있는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는 내 발자욱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복실이는 그가 섬기는 주인이 오시는 줄
안다. 생각없는 주인의 발 자욱 소리마져 그에게는 예사롭지 않다. 남들에게는 단순히 성질 나쁜 발발이지만
나에게는 한 없이 영리한 명견이요 프란다스의 개다.
필자가 군 복무할 때다. 임진강가에서 초병으로 근무하다가 제대를 몇 개월 앞둔 때 부터는
군종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즉 군인 전도사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초소에 근무자들이 투입되고 기나긴 밤동안 그들은 거의 나타나지도 않는 간첩이나
공비들 보다는 고독함과 졸음, 때론 추위와 외로이 싸우게 된다. 그럴 때마다 고향생각도 나고
삭막한 군인생활에 지친 이들의 마음은 더욱 따뜻한 인정을 그리게 된다. 그러한 초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나는 따뜻한 커피, 차 등을 담은 보온병을 자전거에 싣고 철책으로 달려간다.
대대에서 철책으로 들어가려면 자전거로도 한 삼십분은 달려야 한다. 민통선(민간인 통제선)
안에 있는 마을을 지나가야 하는 데, 한 밤에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제일 먼저
나를 반기는 소리가 있다. 개소리... 아니 개 짖는 소리다. 한 개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다 한 소리씩 한다. 깜깜하게 쥐 중은 듯이 고요한 밤하늘은 금새 개 소리들로 가득 찬다.
이렇듯 모두가 잠들어 고요한 마을을 개들이 파수한다. 초병들은 무장공비, 간첩들을 파수하고
개들은 낯 선 침입자들을 파수하고...... 개들은 잠도 없다. 아니 잠을 자다가도 수상한
소리만 들리면 목청을 발사한다. 무엇이 저들을 저토록 충실하게 만들까? 주인이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 행주로 밀어낸 밥상 쓰레기들, 약간 맛이 가서 주인이 먹기에는 안전상의
문제가 있는 음식 아닌 음식들. 겨우 이것들이 저들을 저렇게 만들까?
우리 말에 좋지 않은 것은 다 개다. 그런데 서양사람들의 사고는 우리와 좀 차이 난다.
독일에서는 강아지(?) 하면 귀엽고 예쁜 사람이라는 말이다. 우리 말에 사람이 돼 먹지
못 하면 개만도 못하다고 한다. 이것은 수준을 최하로 낮추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우리 주인을 섬기는 일에 개 만큼만 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충성이다. 우리의 섬기는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 주님은 개들의 주인인 우리들과는 천지차이다. 시시한 음식 부스러기나
주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모든 좋은 것과 자기의 생명까지 주시는 그런 분이시다. 주인이 개를 위해서 죽었다 하면 어리석다하고 웃을 일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개만큼도
못하는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 놓으셨고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를 지셨다. 이 주님을
위하여 개같은 교사가 되고 개같은 전도사가 되자.
전성진
사상교회유년부교사칼럼